국보·보물이 가장 많은 도시, 외국인은 안 갑니다 — 숫자로 본 한국 여행의 빈틈
한국에 처음 오는 외국인은 서울·부산·제주를 갑니다. 당연한 선택이고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짧은 일정에 처음 오는 나라라면 인프라가 갖춰진 곳부터 보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국가유산청이 지정한 국보와 보물이 실제로 어디에 몰려 있는지를 세어 보면, 그 여행 지도와 상당히 어긋납니다. 그 어긋남이 곧 빈틈이고, 두 번째·세 번째 오는 사람에게는 기회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외국인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국보·보물·사적을 시·군·구별로 세어 봤습니다
국가유산청이 공개하는 지정 국가유산 자료에서 국보 372건, 보물 2,557건, 사적 610건, 명승 144건, 국가민속문화유산 333건, 천연기념물 610건을 소재지 기준으로 집계했습니다. 국보에 가장 큰 가중치를 두고 점수를 매긴 결과 상위는 이렇습니다.
- 1위 서울 용산구 — 국보 94 · 보물 309
- 2위 경북 경주시 — 국보 32 · 보물 105 · 사적 85
- 3위 서울 종로구 — 국보 17 · 보물 155 · 사적 29
- 4위 서울 관악구 — 국보 17 · 보물 95
- 5위 서울 성북구 — 국보 16 · 보물 60
- 6위 경북 안동시 — 국보 5 · 보물 54 · 국가민속문화유산 37
- 7위 충남 공주시 — 국보 15 · 보물 21 · 사적 8
- 8위 전남 순천시 — 국보 5 · 보물 57
- 9위 충남 부여군 — 국보 7 · 보물 18 · 사적 21
- 10위 서울 서대문구 · 11위 서울 중구 · 12위 경남 합천군 · 13위 경북 영주시
먼저 함정 하나를 짚고 가겠습니다
1위 용산구, 4위 관악구, 5위 성북구를 보고 의아하셨을 겁니다. 용산에 국보가 94점이나 있다고요?
국보와 보물은 '소재지' 기준으로 지정되기 때문에, 박물관과 대학이 소장한 유물이 그 동네 숫자로 잡힙니다. 용산구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관악구에는 서울대학교 박물관과 규장각이, 성북구에는 간송미술관을 비롯한 소장기관이 있습니다. 전국에서 발굴된 유물이 서울의 박물관으로 모이니 숫자가 그쪽으로 쏠립니다.
그러니까 이 숫자는 "그 동네를 걸으면 국보 94점을 마주친다"가 아니라 "그 동네의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에 가깝습니다. 도시 전체가 유적인 곳과 소장품이 모여 있는 곳은 구분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건 앞의 경우입니다. 경주의 사적 85곳은 박물관 진열장이 아니라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무덤과 절터와 산성입니다.
경주는 국보 32점인데 외국인 방문 순위엔 없습니다
한국관광공사 관광 데이터랩이 공개하는 외국인 방문 상위 40개 시·군·구 목록과 겹쳐 보면 이렇게 갈립니다.
- 경주시 — 국보 32 · 보물 105 · 사적 85 · 외국인 방문 순위 40위 밖
- 안동시 — 국보 5 · 보물 54 · 국가민속문화유산 37 · 외국인 방문 순위 40위 밖
- 공주시 — 국보 15 · 보물 21 · 외국인 방문 순위 40위 밖
- 부여군 — 국보 7 · 사적 21 · 외국인 방문 순위 40위 밖
- 합천군 — 국보 7 · 보물 34 · 외국인 방문 순위 40위 밖
- 영주시 — 국보 7 · 보물 27 · 외국인 방문 순위 40위 밖
경주는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고 사적만 85곳입니다. 안동에는 하회마을이, 공주·부여에는 백제역사유적지구가, 합천에는 해인사 장경판전이, 영주에는 부석사와 소수서원이 있습니다. 전부 유네스코 목록에 이름이 올라 있는 곳들입니다. 그런데 외국인 방문 상위 40개 시·군·구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목록이 절대 방문자 수 기준이라 인구 많은 수도권 자치구가 상위를 차지한다는 점은 감안해야 합니다. 그래도 사적 85곳을 가진 도시가 40위 안에 없다는 건 그 자체로 신호입니다. 갈 만한 게 없어서가 아닙니다.
안 알려진 게 아니라 '덜' 알려진 겁니다
여기서 흔한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외국인이 안 가는 건 몰라서 그렇다"는 생각인데, 데이터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 위키백과 월평균 조회수를 보면 이렇습니다.
- 경주 10,575회 — 강릉(3,452회)의 세 배
- 전주 5,942회
- 강릉 3,452회
- 안동 3,093회
- 참고: 인제 336회
경주는 강릉보다 세 배 더 검색됩니다. 즉 이름은 충분히 알려져 있는데 발길이 안 닿는 상태입니다.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라 "서울에서 3일, 부산에서 2일" 같은 정형화된 일정에 끼워 넣을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첫 방문에는 그 자리가 안 납니다. 인천공항에 내려서 서울을 보고, KTX로 부산에 갔다가, 여유가 되면 제주를 가면 일주일이 끝납니다. 하지만 두 번째 방문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서울을 다시 볼 이유가 줄어드는 만큼 자리가 생깁니다.
성수기 배수가 낮다는 건 나쁜 신호가 아닙니다
이 도시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성수기 배수가 낮다는 것입니다. 성수기 배수는 그 지역의 특정 달 하루 평균 방문자를 그 지역 자신의 평소 하루 평균과 나눈 값입니다.
- 경주 — 8월 기준 평소의 1.09배
- 안동 — 1.02배
- 전주 — 1.02배
- 비교: 강릉 1.29배 · 속초 1.34배 · 가평 1.38배
배수가 낮다는 건 사람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연중 고르게 온다는 뜻입니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아무 때나 가도 특별히 더 붐비지 않는다는 뜻이고요.
강릉이나 속초 같은 계절 관광지는 성수기에 가면 주차장 진입에만 한 시간이 걸립니다. 반면 역사 도시는 그런 일이 잘 없습니다. 대신 겨울에 가면 춥고 여름에 가면 덥습니다. 유적은 대체로 그늘이 없으니까요. 계절 편차가 없다는 건 날짜를 고르기 쉽다는 장점과, 언제 가도 극적이지 않다는 단점을 동시에 가집니다.
한국인에게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외국인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국내 여행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경주는 수학여행지라는 인상이 강해서 성인이 되고 나면 후보에서 빠집니다. 공주·부여는 아예 후보에 오르지도 않습니다. 안동은 하회마을 하나로만 기억되고, 영주는 이름조차 낯선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영주에는 국보 7점과 부석사 무량수전이 있습니다. 목조건축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 축에 드는 곳입니다.
국내 여행 계획을 세울 때 "거기 뭐 있어?"라는 질문에 답이 잘 안 나오는 이유는,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라 정보가 흩어져 있어서입니다. 국가유산청 자료는 지정번호와 소재지로 정리돼 있지 여행자 관점으로 묶여 있지 않습니다.
정리하면
- 국보·보물이 많은 도시와 사람이 많이 가는 도시는 거의 겹치지 않습니다.
- 박물관 소장품이 소재지 숫자로 잡히니 상위권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용산·관악·성북이 그 경우입니다.
- 경주·안동·공주·부여·합천·영주는 이름은 알려졌는데 발길은 덜 닿는 전형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 성수기 배수가 낮아 날짜를 고르기 쉽습니다. 대신 계절감은 덜합니다.
- 두 번째 국내 여행, 두 번째 한국 방문이라면 여기가 비어 있는 자리입니다.
축제모아에서는 지역별로 이런 숫자를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외국인 방문객을 위해서는 몇 번째 방문인지에 따른 추천을, 국내 여행에는 요즘 사람 몰리는 동네와 코스 짜기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데이터에 대해 — 이 숫자의 한계
국보·보물 수는 국가유산청 지정 국가유산 정보의 소재지 기준 집계입니다. 앞서 짚은 대로 박물관·대학 소장품이 포함되므로, "그 도시를 걸으며 볼 수 있는 유산"과는 다릅니다. 국보 몇 점이 아니라 사적·명승처럼 땅에 붙어 있는 유산의 수를 보는 편이 여행 관점에서는 더 정확합니다.
외국인 방문 데이터는 상위 40개 시·군·구만 공개됩니다. "40위 밖"은 순위 밖이라는 뜻이지 외국인이 아무도 안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절대 방문자 수 기준이라 인구가 많은 지역이 유리합니다.
위키백과 조회수는 관광 관심도가 아니라 그냥 인지도입니다. 도시 규모나 뉴스에 나온 빈도도 함께 반영되므로 여행 수요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름을 들어봤는가"의 대략적인 지표로만 썼습니다.
출처: 국가유산청 지정 국가유산 정보 · 한국관광공사 「한국관광 데이터랩」 지역별 방문자 수 · 위키미디어 조회수 통계. 유산 개방 여부와 관람 시간은 별도로 확인하세요. 사적 중에는 상시 개방이 아닌 곳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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